식재료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까닭


가을 초입을 넘어선 9월 말, 경상북도 김천의 수도산 자락을 찾았다. 해발 1,400m의 가야산과 이웃한 수도산은 1,300m의 높은 산이다. 김천은 국내 자두 생산량의 20%를 생산하는 자두의 본고장이다. 산 높은 수도산 자락을 찾은 이유는 가을에 나는 추희 자두를 찾으러 간 것은 아니다. 해발고도가 높아 맛있는 사과가 나는 동네이기도 하지만 새콤달콤한 노란 신품종 사과가 난다고 해서 찾아 갔다. 
시나노 골드



사과는 빨갛다. 우리 상식은 그렇다. 파란 사과로 알고 있는 아오리도 정작 빨갛게 물들어야 맛있는 사과다. 저장 기술이 없던 시절 한여름에 덜 익은 아오리를 원래 파란 사과인 양 팔았을 뿐이다. 저장 기술이 좋아져 작년에 수확한 부사를 7월까지 판매하니 시큼한 아오리 설 자리가 점점 좁아졌다. 
노란 사과가 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골덴’을 기억할 것이다. 인도 사과라고도 했던 노란 사과 말이다. 한동안 노란 사과를 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노란 사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골덴 사과가 사라진 까닭은 저장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수확하고 시간이 지나면 바로 푸석거렸다. 아삭한 사과를 좋아하는 우리네 입맛과 맞지 않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골덴이 사라지고 한동안 빨간 사과만이 있었다. 2010 중반 시나노 골드라는 노란 사과가 시장에 나왔다. 일본에서 육종한 품종으로 익으면 노란빛에 살짝 푸른빛이 돈다. 시나노 골드는 골덴처럼 푸석거림이 없다. 박스를 열면 단내가 먼저 반길 정도로 향도 좋다. 9월 말과 10월 초 사이에 수확한다. 한 번 맛보면 달곰한 맛에 푹 빠질 정도로 매력 가득한 사과다. 
시나노 골드, 홍옥, 국광, 부사, 양광, 아오리, 산사 등은 일본에서 육종한 품종이다. 시나노 골드를 맛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육종한 것도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아쉬움 마음을 가지고 출장을 다녔다. 올해 9월 김천의 수도산을 찾는 까닭이 바로 몇 년째 품고 있던 아쉬움을 해소하고자 함이었다. 
황옥

품종 이름은 ‘황옥’으로 1994년 육종을 시작해 15년만인 2009년에 완성한 품종이다. 홍옥과 비슷한 홍월과 빠르게 수확하는 부사 품종인 야다카 후지를 교배했다. 황옥은 새콤달콤한 홍옥과 비슷한 맛이지만 당도가 홍옥보다 좋아 시원한 단맛이 일품이다. 게다가 홍옥은 시간이 지나면 골덴처럼 푸석해지는데 홍옥은 단단함이 부사 못지않아 저장성까지 좋다.

김천 산지에서 황옥 맛을 보다가 부천의 기쁜 파이 전문점이 생각났다. 해피파이는 홍옥으로 매년 계절 파이를 만들었다. 홍옥보다 단단하고 새콤달콤한 황옥이라면 파이 재료로 손색이 없을 듯싶었다. 예상대로 황옥으로 만든 파이는 맛있었다. 황옥의 당도가 홍옥보다 좋기에 파이 만들 때 들어가는 설탕양이 줄었다고 한다. 본래 가지고 있는 단맛으로 맛을 업그레이드한 파이를 먹어 본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황옥은 파이 굽기에 좋은 품종 만은 아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좋기에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의 디저트로 좋다. 후식으로 사과나 과일을 내는 곳이라면 색다른 맛의 노란색 사과이기에 고객들에게 재미난 경험을 줄 수 있다. 황옥 말고도 재미있는 품종이 하나 더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작은 사과인 알프스 오토메가 유행을 했다. 자두만 한 크기의 사과로 꽃사과로 부르기도 했다. 원래 알프스 오토메는 꽃가루받이나무로 심었던 사과다. 사과나무에 꽃이 피어도 같은 종끼리 있으면 열매가 잘 맺지 못한다. 주변에 다른 종의 사과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역할을 꽃가루받이나무가 한다. 알프스 오토메는 꽃가루받이나무 중에서 그나마 맛이 있던 사과였다. 다른 사과들과 달리 앙증맞은 크기에 유행했으나 맛이 급격히 떨어지는 단점으로 사라지고 있다. 알프스 오토메의 단점을 보완한 사과가 바로 ‘피크닉’이다. 크기는 자두 정도의 작은 사과지만 사과의 맛을 작은 몸에 오롯이 담고 있다. 처음 보면 작아서 놀라고, 맛을 보면 뛰어난 맛에 두 번 놀란다. 차갑게 해서 먹으면 한 번 더 놀란다. 자를 필요 없이 인원수대로 하나씩 낼 수 있어 이래저래 좋은 사과다.

국민학교,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딸려 나오던 사회과부도라는 부록이 있었다. 기억으로는 지리책이면서 특산물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강화 화문석, 대구 사과’ 이런 식이었다. 그 덕에 오랫동안 지역 + 특산물의 조합이 당연시됐다. 이제는 지역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다.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지역에 맞는 품종이 더 중요하다. 경북 사과가 맛있다고 하는 것보다는 “9말10초의 경북 김천 수도산 작목반의 황옥이 맛있다”라고 하는 게 맞다. 이웃한 사람을 ‘김 씨’, ‘부산댁’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있음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존재 의미를 그 정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북 사과 = 김 씨’다. 수도산 작목반의 황옥 = 김진영’이다. 김 씨라 불렀다면 존재의 의미는 딱 김 씨 만큼이다. 이름까지 부르는 순간 존재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몰랐던 식재료 맛 하나 하나 도드라진다. 사과뿐만 아니라 모든 식재료가 그렇다. 식재료를 이름까지 불러야 하는 까닭이다. 



댓글

가장 많이 본 글